OHOHH
지난 연말 ‘번잉’ 이라는 전시를 하면서 그림을 아주 기능적으로 사용해 보았다. 두 장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기능적으로 사용한 그림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총체적인-전면적인 그림’ 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지 ‘기능적인 그림’ 이라면 네가 생각하는 그 잘난 ‘그림’은 대체 뭐냐, 고 묻는 것이었다. 무거우리라고 예상했던 물건이 생각보다 더 무거웠을 때, 의식은 긴장하지만, 육체는 삐걱댄다.
어떤 답: 육신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그 질문을 들고 계속 그리는 거다. 끝도 해결도 없다. 다만 질문의 무게를 못 이기는 순간 해방이다. 破産파산; 이렇게 되면 너무 ‘답’ 같아서 못마땅하다.
정답-모른다. 멀리까지 모른다. (먼-) 모른다.
현재의 답: 기댈 수 있는 모든 변수에 기댄다. 우연에도 구걸한다. 답이 있을 수도 있다고 자기 최면을 건다. 질문을 못 들은 체 한다. 기타 등등의 자구책들.
나는 저속함에 꽂혀 있다. 그것의 편재성遍在性에 매혹된 건지 그것 자체의 구질구질한 ‘냄새’에 홀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여튼 저속하다는 것은 후각과 관련이 있다. 어디에나 있고, 널리 퍼지고,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없어도 알 수 있으며, 강렬하다.
생명체는 모두 냄새가 난다. 저속함에 대한 탐구는 냄새에 대한 탐구이다. 언어도단인 게 그냥 살면 되는 본능을 탐색해야 한다는 거다.
-심지어 광물에게도 냄새가 있단다. 안의 냄새인지 밖의 냄새인지는 모르겠으나.
애욕은 낡고 거창해서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아직은’ 보편적이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버튼만 누르면 사라지는 헛것도 아니다.
작업은 그 안에서 시작되고 그 안에서 끝난다. 그럴까? 작업은 그 밖에서 시작되고 그 언저리에서 끝난 체 하는 건 아닐까?
하면서 안하기. 안하는 체 하면서 하는 것, 하는 체 하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면서 하기. 안 해-해, 해-안 해.
꿈의 압력. 힘든 꿈 중에 이런 게 있다. 꿈속에서 나는 뭔가를 벽에다가 계속 쓰고 있다.(써야 한다) 게다가 그걸 계속 읽어야 한다. 그런데 쓴 것들은 금방 사라진다. 읽을 수 없다. 나중에는 읽는 걸 쓰는지, 쓰는 것과 읽는 것이 같은 내용인지 전혀 별개의 것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마냥 벽에 달라붙어서 중얼거리고 있는 거다.
애욕이 내게 원하는 건 애욕에 시달리지 말고 애욕을 사랑해 달라는 것일까?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거기, 사랑에 필요한 거리距離만큼 떨어진 그 자리에서 견뎌라, 뭐 그런 것인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무슨 돌덩어리도 아니고. 동파凍破 되지 않고 얼어붙는, 그런 묘기를 연마硏磨라도 해야 하나?
몇 장의 그림들은 애욕의 여러 모습이다. 그런데 애욕 OHOHH는 발음되지 않는다. 그건 신음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