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시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추악하게만 보였던 한국의 풀떨기와 돌들까지도 아름다워 보였다.
김수영-나의 信仰은 <자유의 회복>- 중에서

4. 19 직후 쏟아져 나온 ‘4. 19 시’ 의 ‘시적 성취’에 대한 어느 재일在日평론가의 찬사에 대해 김수영시인은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그것은 시의 성취가 아니라 자유의 성취이고, 그 때는 시인들의 시뿐만이 아니라 신문의 투고 시 조차도 아름다웠다, 자유란 시에 있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라고. 뒤이어 인용한 풀떨기 운운의 글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 눈에 일상의 것들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건 그런 자유를 위해 싸웠던 역사가, 그 역사의 기억을 지향하는 시간이 일상에 스며서 그런 것이 아닌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자유는 여전히 ‘회복’되어야할 무엇이고, 사실은 창안해 내어야 할 그 무엇이다.
윤리적인 것과 미적인 것, 윤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정치적인 것과 미적인 것이 그럼에도 물리적인 화면에서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물질로서의 그림은 세계를 보는 방법을 예시해야한다.
그리고 어째든 ‘화가’는 그 책임에서 도망치려고 온갖 수를 생각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자장磁場 안에서조차 그걸 그리워하면서.
자가당착이란 자유의 영역을 1mm라도 넓히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지.
적어도 내게는 그럴 것이다.

황세준의 도시풍경/ 최민(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