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에 대해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세계를 구성하고 싶어 한다.
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 세계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세계를 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실재하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참여하는 일이 떠맡아야하는 그 막중한 윤리의식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작업을 통한 최소한의 개입/ 불개입만이 나라는 존재를 입증하는 단 하나의 방식이다. 그렇다고 노숙자 혹은 중독자가 될 수는 없으므로.

나는 주로 평면 작업을 한다. 하나의 프레임이 존재한다. 이 프레임은 그것이 입체적이든, 평면적이든 하나의 순간이므로, 하나의 프레임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공간의 평면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어느 한 점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본다. 내가 3차원으로 구성되어있고, 세계 역시 그러하므로, 사실 내가 느끼는 공간은 평면이다. 그래서 공간적으로 입체이든 평면이든 내게는 시간의 한 평면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 시간의 한 점-시간의 평면에서부터 무수한 시간의 프레임들이 풀려져 나온다. 작업을 감상한다는 것은 아마 이 과정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보편적인 미술의 역사를 대체로 무시한다. 특히 근대 이후의 미술사를 모른 체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나치게 ‘미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역사’ 자체를 구성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당면한 동시대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에도, 즉 구성되는 역사의 밖에서-그것을 바라보기에도, 그리고 그 바라보기를 하나의 프레임 안으로 재구성하기에도 벅차다. 아니 벅찰 정도가 아니라, 거의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

내 속에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윤리의식과 통시적으로 ‘삶’이라고 말해지는 것을 바라보는 뭐랄까, ‘영원의 눈’ 이랄까가 때때로 부딪힌다. 살아있는 일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눈과 이 세계의 참혹함을 보는 눈이 교차하면서 분열한다. 아마 내 작업은 그 분열의 어설픈 기록일 것이다.

포트폴리오를 만들려고 보니 자료가 너무 없다. 나는 자료 모으는 일에 매우 게을렀다. 자료를 기록하고 모으는 일에 대한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였다. 자료 관리가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작가인지를 늘 의심했으며, 이 세계에 작가가 필요한 것인지도 늘 의심했다. 일종의 잘난 체를 한 것인데, 그것의 결과는 1, 2회 개인전 작업의 전량 분실, 대부분의 사진자료 분실, 기획전 출품작업 파기 및 사진자료 분실, 그리고 이토록 부실한 포트폴리오로 남았다. ‘죄와 벌’이랄까. 자의식은 청년의 것이고, 나는 청년이 아니다. 이걸 보게 될 분들께 부실한 자료에 대해 송구스럽다. 하지만 자료가 모두 남아있었다고 해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